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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이 한 - 스키타이인들은 인도·이란 계통의 민족이었다. 최근 일부 학자들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의하면 종족의 명칭도 ‘스쿠타(skuta)’라는 고대 이란어에서 나왔으며, 이는 오늘날 영어에서 ‘shooter’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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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a26.01.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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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이

무제에게

올린

보고

대완은 흉노의 서남쪽에 있고 한나라에서는 정서(正西)에 있으며 한나라에서 대략 만리는 됩니다. 그 풍속은 정착생활(土著)이고 농사를 짓고, 쌀과 보리를 심으며 포도주(蒲陶酒)가 있습니다. 좋은 말이 많은데 말이 피땀(汗血)을 흘리며 그 조상은 천마(天馬)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성곽과 가옥이 있고, 그 속읍(屬邑)으로는 크고 작은 70여개의 성(城)이 있으며, 백성의 수는 대략 수십만 명이 됩니다. (중략) 우전(于    )의 서쪽에서 강물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 서해(西海)로 주입되며, 그 동쪽에서 강물은 모두 동쪽으로 흘러 염택(鹽澤)으로 주입됩니다. 염택의 물은 지하로 잠행하는데, 그것이 남쪽으로 흘러와 황하의 근원이 되어 ‘지상으로’ 분출됩니다. 옥석이 많이 나며 황하는 중국으로 흘러듭니다

[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

(5)]

흉노와 훈족

,

민족 대이동의 시대

한족과 신흥 선비족에 쫓겨간 흉노

2

세기 후 훈족으로 유럽사에 등장


4

세기 중반 흑해 고트족 공격하며 유럽 공포로 몰아넣어


피란민 로마제국 변방에 수십만명 몰려들어 대혼란


게르만 대이동과 서로마 붕괴 불러


452

년 아틸라

,

알프스 넘어 로마시까지 파죽지세로 진격


피란민들 해안가로 도망가 ‘바다도시’베네치아 등 건설


훈족의 영웅’ 아틸라

,

황화론 상징


숱한 신화 남기고 결혼식날 급사… ‘니벨룽겐의 반지’주인공으로


고트족 반란 등 내부 분열로 유럽 흔든

100

여년 정복 역사 막 내려

▲ 훈족과 고트족을 묘사한 스케치.

376년 다뉴브 강가의 전방초소에 배치된 로마제국의 군관에게 긴급한 보고가 접수되었다. 북방 야만인 사이에 이상할 정도로 거대한 동요가 감지되고 있으며, 어디에선가로부터 출현한 무서운 민족의 공격을 받아 고향을 버리고 도망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군관들은 처음에 이같은 보고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나, 곧 많은 수의 야만인이 다뉴브강 북안에 밀려들어 제국의 보호를 요청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들은 흑해 북방에 거주하던 고트족이었고, 그들을 밀어낸 새로운 민족은 바로 역사상 유명한 훈족이었다. 훈족은 370년경부터 휘하의 알란족을 이끌고, 돈강과 드니에스터강 사이 지역에 있던 동고트(Ostrogoth) 왕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고트의 국왕 에르마나릭은 절망 속에서 자살하고 말았고 훈족의 말발굽에서 피신한 잔중(殘衆)은 서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을 뒤쫓은 훈족이 강을 건너 서고트(Visigoth)를 압박하자 수많은 고트족이 가재도구를 챙겨서 다뉴브강으로 밀려들었던 것이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당시 로마제국의 변경으로 밀려든 피란민의 수가 20만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역사상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훈족과 훈제국은 453년 아틸라의 죽음으로 그 세력이 와해될 때까지, 게르만족의 대대적인 이동을 격발시키고 결국은 (서)로마제국의 붕괴라는 사태까지 초래하였던 것이다. 일찍이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와 같은 학자는 훈족의 침입과 게르만족의 이동이 유럽사에서 고대의 종말을 가져온 사건이라고 규정하기도 했고, 이러한 주장은 그 뒤 프랑스의 역사학자 피렌에 의해 비판되면서 유럽사의 시대구분 논쟁을 촉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던 훈족은 누구였으며 어디에서 온 사람인가. 4세기 후반 동로마의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훈족의 생김새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훈족은 아이들이 태어나면 그 뺨에 쇠붙이로 깊은 상처를 내어, 어른이 된 다음에 수염이 날 때에도 주름진 상처로 인해 털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수염이 없는 그들은 흉물스럽게 되고, 내시처럼 보기에도 역겨운 모습이다. 그들은 지저분할망정 그런대로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다. 어찌나 강인한지 음식에 맛을 내지도 불에 굽지도 않고… (생고기를) 자기 허벅지와 말 등 사이에 끼워 넣어 따스하게 한 뒤에 그냥 먹는다.” 448년 아틸라의 캠프에 직접 다녀온 적이 있는 또 다른 역사가 프리스쿠스도 훈족의 외모에 대해서 넓은 어깨와 가슴, 키는 작지만 말 위에 앉으면 커 보이는 인상, 납작한 코, 작고 찢어진 눈 등을 기록하여 몽골로이드적인 특징을 지적한 바 있다.

▲ 훈족의 이동 경로

그래서 드 기네(De Guines·1721~1800) 같은 프랑스 학자는 일찍이 훈족은 바로 몽골초원에서 이주해온 흉노족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던 것이며, 그 근거로 훈과 흉(노)이라는 명칭의 유사성, 양자 모두 몽골로이드적인 외모를 갖고 있었으며 유목민족이라는 점, 중국 측 문헌에 보이는 기록 등을 지적했다. 그 후 여러 학자들이 흉노·훈 동족론에 대해 찬반의 뜨거운 논쟁을 벌였는데, 현재는 동족론을 지지하는 입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서 간의 여러 자료를 토대로 흉노가 서방으로 이주하여 훈족으로 나타난 과정은 이렇게 정리된다. 기원후 48년경 흉노는 누가 군주의 자리를 차지하느냐는 문제를 두고 심각한 내분이 일어나 두 조각으로 분열되고, 남흉노는 고비사막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한나라의 보호를 받고 북흉노가 초원을 호령하는 사태가 되었다. 그러나 북흉노는 한제국과 남흉노 연합세력의 압박을 받는 한편 초원 동부지역에서 흥기하기 시작한 선비족의 공격을 받으면서 약화되어, 91년에는 몽골리아를 포기하고 중앙아시아의 일리강 유역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흉노는 그곳을 근거로 인근 도시국가들을 지배하기도 했지만 결국 몽골리아 초원의 새로운 패자인 선비족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2세기 중반경 더 서쪽으로 옮겨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초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이들은 역사적인 기록에서 포착되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린 듯했지만, 4세기 중반 갑자기 ‘훈’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훈족의 침입과 게르만족의 대이동 경로

당시 유럽인은 이러한 사정을 알 리가 없었기 때문에 훈족의 출현에 대해 기이한 설화들을 지어내어 이해하려고 했다. 6세기 중반 동로마의 역사가 요르다네스(Jordanes)는 고트족 사이에 유포되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옛날에 필리메르라는 이름의 고트족 왕이 있었는데 어떤 마녀를 스키타이인이 사는 황무지로 추방했는데, 황야를 떠돌던 한 악령이 그 마녀를 발견하고 결합하여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민족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초자연적일 정도로 가공할 훈족의 잔인성과 파괴성을 경험한 고트족의 심리를 잘 반영하는 설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로마인은 다른 설화를 유포시켰다. 즉 훈족은 원래 흑해 북단의 크리미아 반도 부근에 있는 소택지 건너편 동쪽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들이 기르던 암소 한 마리가 쇠파리에 물려 놀라서 서쪽으로 도망치자 그것을 잡으러 온 목동이 소택지 서쪽에 펼쳐진 풍요로운 초원을 보게 되었고, 그 이야기를 들은 훈족이 대거 서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환경과 생태적 요인을 지적하고 있으며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훈족의 이동을 설명해주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370년대 훈족의 침입과 고트족의 이동이 벌어진 뒤 로마제국의 변경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년 뒤인 400년경 훈족의 제2차 파도가 덮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울딘(Uldin)이라는 수령이 이끄는 훈족의 공격을 받은 고트족 집단이 헝가리의 판노니아 평원으로 도망쳐 왔다가, 404년에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갔지만, 울딘도 그들을 추격하여 로마와 합세하여 격파하였다. 훈족의 활동은 게르만족의 거대한 민족이동을 촉발시켰다.


판노니아 지방에 살던 반달족, 수에비족, 알란족 등이 이동을 시작하여 406년에는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 지방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프랑크족과 전쟁을 한 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가 왕국들을 건설했다. 그 가운데 반달족은 428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아프리카 북안의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반달왕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대혼란의 와중에 서로마제국도 안전할 수는 없었다. 훈족에 쫓긴 서고트족은 알라릭이라는 수령의 지도하에 알프스를 넘어 410년에는 제국의 심장이요, ‘영원한 수도’였던 로마시에 돌입하여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던 것이다.


울딘이 사망한 뒤 훈족을 통솔했던 인물은 옥타르(Octar), 루아(Rua), 문디욱(Mundiuc) 삼형제였는데 가장 강력했던 인물은 루아였다. 그는 426년 동로마를 공격하여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서 막대한 보상금까지 받아내기도 했다. 루아가 죽자 문디욱의 아들인 블레다(Bleda)와 아틸라(Attila) 형제가 지배권을 장악했지만, 블레다가 사망함으로써 드디어 아틸라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443년 그는 훈족 기마군단을 이끌고 동로마 영내로 들어가 70개가 넘는 도시를 약탈하자 테오도시우스는 제국 영토의 반을 할양해주고 막대한 액수의 보상금과 세폐(歲幣·공물)를 바치기로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틸라는 450년경부터 공격의 예봉을 서로마로 돌렸다. 그는 서로마 황제의 여동생인 호노리아(Honoria)를 신부로 줄 것과 결혼지참금으로 영토의 반을 떼어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이 거절되자 451년 그는 예속된 게르만 부족들을 소집하여 50만 대군을 편성한 뒤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로 들어갔다. 당시 번영하던 도시인 메츠(Metz)를 잿더미로 만든 뒤 센강을 건너 갈리아 지방 최대의 요충이던 오를레앙(Orlean)을 포위했다. 때마침 아에티우스(Aetius)가 지휘하는 로마군과 테오도릭(Theodoric)이 이끄는 서고트 연합군이 도착하여 훈족과 일대 결전을 벌였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카탈라우눔(Catalaunum) 평원의 대회전이다.
이 전투에서 테오도릭은 전사하고 고트족도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로마군은 후퇴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아틸라의 승리로 끝난 것도 아니었다. 너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그는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 평원으로 돌아가버렸다. 말하자면 무승부로 끝난 셈이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하루의 전투에서 사망한 인원이 30만명에 달하여 그 흘린 피로 강물이 불어넘치고 밤에는 전사자의 망령이 적을 찾아 헤매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퍼질 정도였다고 한다.
로마인은 아틸라의 철수를 자신들의 승리로 착각했지만 그러한 환상은 다음해인 452년 아틸라의 침공으로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이번에 그는 곧장 알프스 동부를 넘어서 이탈리아로 내려왔다. 그는 동북부에 위치한 아길레야(Aguileia)를 3개월간 포위한 끝에 함락시켰는데, 당시 거기서 빠져나와 해안가 섬과 소택지대로 도망간 사람들이 건설한 도시가 후일 베네치아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틸라는 이어서 포(Po)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는데 밀라노, 파비아 등의 도시에 무혈입성한 뒤 남하하여 로마시로 진격하였다. 궁지에 몰린 시민들은 사신을 보내 화평을 제의했고 아틸라는 이를 받아들여 철군을 결정했다. 교황 레오 1세의 설득에 의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퍼지기도 했지만, 사실은 아틸라가 이미 넘칠 정도로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고 또 초원을 떠난 지 오래된 병사와 군마가 지친 상태에 역병까지 돌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는 황제의 여동생 호노리아와 결혼지참금에 대한 약속까지 받았으니 전쟁을 계속할 이유도 없었다.
이처럼 로마를 무릎 꿇게 하고 번영과 발전의 미래를 펼치려던 훈제국이 갑작스럽게 무너져 버렸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아틸라의 죽음이 가져온 결과였다. 453년 그는 일디코(Ildico)라는 미녀를 맞아들여 혼례를 올린 뒤 잠자리에 들어갔는데, 다음 날 아침 아틸라는 코에 피를 흘린 채 시체로 발견되었고 신부는 그 옆에서 울고 있었다. 그가 여인의 칼에 찔려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로마인 사이에 퍼지긴 했지만 시신에서는 아무런 상처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소문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실은 그 전날 밤 과음한 상태에서 잠에 들었다가 자는 도중 코피가 터져 기도가 막혀버리는 바람에 그만 질식사하고 만 것이었다. 충격에 빠진 훈족은 고대 유목민이 그러했듯이 칼로 얼굴을 그어서 상처를 내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애통을 표시했다. 그의 시신은 초원 한가운데에 세워진 비단 천막 안에 안치되었고, 유목전사들은 그 주위로 말을 달리면서 아틸라를 위한 애가를 불렀다고 한다.
아틸라의 죽음과 함께 훈제국은 급속하게 분열되었고 뒤이어 예속된 고트족의 반란으로 인해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훈족의 침공이 남긴 역사적 기억은 오랫동안 유럽인에게 남았다. 흔히 헝가리(Hungary)도 음이 비슷하여 훈족의 후예가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지만 직접적 연관은 없다. 헝가리라는 말은 ‘온 오구르(On Oghur·열 개의 부족이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훈족의 기억은 게르만족의 서사전승(saga) 가운데 녹아 들어 아틸라는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프랑크족과 부르군드족의 왕을 격파하는 인물로 등장하는 에첼(Etzel)의 원형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아틸라는 ‘신의 채찍’으로 불리며 후일 ‘황화(黃禍·Yellow Peril·황인종이 일으키는 재앙)’를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 되기도 하였다.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을 가로질러 유럽에 등장한 유목민족 훈은 이렇게 해서 유럽의 역사를 뒤흔들어 놓고 유럽인의 기억 속에 깊은 각인을 남기고 사라졌던 것이다. ▒


 

▲ 훈족의 영웅 아틸라를 새긴 로마제국의 화폐.

아틸라를

위한

애가

[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

(6)]

신질서를 모색하는 고대 중앙유라시아

동아시아

,

·

흉노 양극체제 무너지며 대혼란…

7

세기 당제국으로 매듭


중국

,

오호십육국

·

위진남북조 거쳐 수나라로 통일


북방은 선비

·

유연 지배 거쳐

6

세기 돌궐제국으로


·

,

유목민 영향 漢보다 개방적


중국 역사상 북방민족의 지배기간이 절반 넘어


북방민족

, 200

년 가까이 산둥성 등 중국 북부전역 약탈


북방 새 강자 돌궐

,

카스피해까지 지배


유목민 일부 한반도로 이동

,

신라지역 정착 가능성


일부 학자 “일본까지 진출 야마토 정권 수립” 주장도

▲ 내몽골 호린게르에서 발굴된 선비족 묘의 벽에 그려진 수렵도.

한 학자는 일찍이 수천년의 중국 역사를 한마디로 정의하여 “만리장성을 사이에 둔 남과 북의 대결”의 역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이같은 단언은 중국사의 내적인 변화와 발전을 무시하고 대외적인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북방민족과의 갈등과 대결, 정복과 복속이 중국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테마의 하나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제국이 출현한 기원전 221년부터 마지막 왕조 청제국이 멸망한 1911년까지 2000여년 가운데, 중국의 일부 혹은 전체가 북방민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던 기간은 거의 반 정도에 이른다. 게다가 흔히 한족왕조로 분류되는 수당제국도 사실상 그 건국세력이 북방계의 혼혈인 소위 ‘관롱집단’이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최근 일본의 한 대표적인 학자는 북위는 물론 당제국도 모두 선비(鮮卑)족 계통의 ‘탁발(拓跋)국가’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한 바 있다. 우리가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중국사를 ‘남과 북’ 대립의 역사로 보는 것도 결코 과장이라고 하기만은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역사에서 한족에 대한 북방민족의 장기간의 정복과 지배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史實)’이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다. 과거 중국의 학자들은 비록 중국이 일시 군사적으로 북방민족의 지배를 받긴 했지만, 한족의 탁월한 정치·문화적 수준과 인구·경제적 역량은 소수의 이들 지배자를 흡수하고 동화시켜 결국 한민족의 일부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고 주장해 왔다. 이것이 소위 ‘한족중심 동화론’이다.

그러나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은 한족중심주의를 명백하게 배격하고 있다. 한족은 다른 55개 소수민족과 더불어 중국의 역사를 성립·발전시켜온 ‘중화민족’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다. 다시 말해 고대의 흉노족, 선비족, 여진족, 몽골족, 만주족 등도 모두 중화민족의 일부라는 것이다. 과거 ‘한족중심주의’는 ‘중화민족중심주의’에 의해서 대체된 셈이다. 이런 논리를 인정한다면 그들의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될 수밖에 없고, 현재 ‘동북공정’이니 ‘서북공정’이니 하면서 북방민족의 역사를 중국화하는 작업도 그 필연적인 귀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중국 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이제까지 외국 학자들의 입장은 어떠했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같은 입장을 방조하고 강화시켜 주었던 것 같다. 소위 ‘정복왕조론’이라는 것이 그런 역할을 했다.

중국이건 외국이건 불문하고 이렇게 북방민족과 중국의 관계를 관찰할 때 중국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에 관한 거의 모든 기록이 한문으로 쓰여 있다는 데에 기인한다. 물론 시대가 내려오면 북방민족도 독자적 문자를 만들고 기록을 남기긴 하지만 여전히 전달되는 정보의 양은 제한적이다. 그렇다보니 문헌기록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학자의 관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기록자의 관점을 취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의 ‘주관’이 아니라 ‘객관’인 것처럼 믿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의 역사를 중국 측 기록에만 의존해서 연구하고 서술한다고 상상해보자. 게다가 현재 다른 소수민족처럼 우리도 중국의 영토 안에 편입되어 있다고 가정해보자. 한국사를 서술한 책의 내용은 아마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 따라서 북방민족, 나아가 중국 ‘주변’ 민족의 역사를 연구할 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기존의 텍스트(여러 형태의 사료)를 ‘해체’하여 그 패권적인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은 첫째로 텍스트 안에 내재된 중국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일과, 둘째로 비(非)중국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일이다. 한제국 붕괴 이후 약 350년간 일어난 역사에 대해서도 그동안 줄곧 중국 중심적 역사관에 의해 이해·서술·교육되어 왔지만, 이제는 남북의 균형된 역사서술의 틀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

먼저 장성 이남 지역에 대해서 살펴보자. 기원후 220년 한제국의 멸망 이후 위·오·촉이 정립하는 삼국시대가 도래했고 뒤이어 (서)위와 (서)진의 짧은 통일왕조가 들어섰다. 그러나 곧 흉노·갈호·선비·저·강 등 소위 ‘다섯 오랑캐(五胡)’ 민족이 잇따라 화북을 정복하고 여러 왕조를 건설하는 ‘오호십육국’의 시대로 넘어갔다. 이제까지 이에 대한 서술은 ‘역사가 없는 민족’들이 갑자기 중국사의 무대에 나타나 야만적인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것처럼 묘사되어 왔다. 그런가 하면 위트 포겔과 같은 학자는 이들에게 ‘정복왕조(Conquest Dynasties)’의 특수한 형태로서 ‘침투왕조(Infiltration Dynasties)’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 까닭은 몽골이나 만주처럼 일거에 장성을 돌파하고 중국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조금씩 천천히 마치 물이 삼투되듯이 중국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한편 화남지방에는 한족의 망명정권이 고도의 문화수준을 유지하면서 흥망을 거듭했고, 그러는 사이 화북지역에서도 선비족 계통의 (북)위왕조가 통일을 이룩하고 마침내 중국문명의 세례를 받고 ‘한화(漢化)’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어 그 계승국가들에 의한 통치가 계속되다가 589년 마침내 수나라에 의해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제국이 회복되었고, 당제국에 의해 계승되면서 중화왕조는 화려한 부흥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성 이남의 이같은 역사적 전개는 중국사의 맥락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중국사상 위진남북조라는 분열·혼란기는 그에 선행했던 시대에 동부 유라시아 국제질서의 기본적 틀이었던 한·흉노 남북대립의 양극체제의 붕괴로 발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리장성 이남의 농경지대 중국에서 일어났던 혼란과 유사한 현상이 흉노제국 붕괴 이후 북방 초원지대에서도 관찰되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바로 이러한 혼란의 파장이 확대되면서 중국사상 ‘오호십육국 시대’가 출현한 것이다. 그 과정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원후 1세기 중반 흉노가 분열되면서 일부가 고비사막을 건너서 남하했고 한제국의 영내에 거주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북방민족 남하의 시발이 되었다. 한편 초원에 잔류했던 또 다른 흉노(북흉노)가 91년경 멀리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떠나버리자, 그 자리를 채우고 들어온 것은 동쪽의 선비족이었다. 장성 이북의 새로운 패자가 된 선비족은 잔류한 흉노인을 흡수하며 중국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전을 시작하였다. 2세기 전반이 되면 약탈의 무대는 요동·요서 지역은 물론이지만 서쪽의 대군·오원·삭방 등 산서성 북부도 포함되어 중국 북부 거의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이 약탈전은 씨족·부족을 기본 단위로 하여 각 집단의 군장의 지휘하에 때로는 독자적으로 때로는 연합적으로 진행되었다. 한문자료에는 그들이 ‘대인(大人)’으로 기록되었으나 물론 선비족 고유의 명칭을 의역한 것이다. 2세기 초에는 ‘선비의 읍락 120부(部)’가 각자 중국 측과 외교관계를 맺는 등 각개약진의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2세기 중반 단석괴(檀石槐)라는 인물의 출현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약탈전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분산된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동부·중부·서부의 삼부체제로 재편하였다. 이것은 유목군대의 전형적 편제방식인 좌익·중군·우익에 준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므로, 말하자면 선비족은 단석괴의 지도 아래 대규모 군사동맹체를 결성하게 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사망한 뒤 혼란에 빠진 선비는 가비능(軻比能)이라는 인물에 의해 일시 세력을 회복하지만 235년 그가 암살당하자 선비연합체는 각 지역으로 분산·할거하면서 대대적인 이동의 물결이 일어났고 일부는 남하하여 북중국으로 들어갔다. 3세기 말이 되면 화북 지역에 거주하는 호족(胡族)의 숫자가 600만~700만명에 이르게 되는데, 당시 한족이 1000만명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유목민이 남하했는지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민족대이동의 물결 속에 일부 유목민은 북중국이 아니라 한반도로 내려와 신라지방에 자리잡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이유는 4~5세기가 되면 신라에서 갑자기 대형 적석목관분이 조영되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중앙유라시아의 문화적 기류를 느끼게 하는 유물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양한 마구, 커다란 솥인 동복(), 동물양식의 버클, 아키나케스식 단검, 금관, 유리제품 등이 그러하다. 또한 이 시기에 신라의 임금은 마립간(麻立干)이라는 새로운 칭호로 불렸는데 ‘간’은 유목국가의 군주인 ‘칸(khan)’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칸’이라는 칭호는 바로 그 즈음에 선비 계통의 유목민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와 같은 학자는 유목민의 일부가 한반도를 경유하여 일본으로 들어와 4세기 말경에는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토(大和)정권을 세웠다는 소위 ‘기마민족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부에서 훈족의 출현으로 민족대이동이 일어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대륙의 동부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거대한 규모의 민족이동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평행현상은 대륙의 동서 양단에서뿐만 아니라 장성의 남과 북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즉 양측 모두 한과 흉노의 붕괴로 인해 발생한 극도의 혼란에서 단계적으로 통일의 국면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밟아 나갔다. 북방에서 선비족의 부족별 난립이 단석괴·가비능에 의해 정리되었듯이, 남방에서도 오호십육국의 초기 혼란기가 티베트 계통의 전진(前秦)에 의해 정리되었다. 뒤이어 북방에서는 선비족의 뒤를 이어 4세기 후반 유연(柔然)이라는 새로운 민족이 초원의 패권을 장악하고 강력한 유목국가를 건설하게 되는데, 거의 같은 시기에 남방에서도 선비족 계통의 탁발(拓拔)부족이 남하하여 북위정권을 세우면서 화북을 통일하고 안정된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 두 국가는 오랫동안 군사적으로 대치하면서 전쟁을 계속했는데, 몇 년 전 애니매이션 영화로도 소개되었던 ‘뮬란’의 주인공 ‘목란(木蘭)’은 바로 유연과 전쟁에 투입된 탁발족 여인이었다.

▲ 내몽골에서 출토된 말머리와 소머리에 사슴뿔을 접합시킨 선비족의 금관.

그러다가 마침내 중국에서는 589년 수나라가 3세기 반 만에 통일제국 건설에 성공했는데, 북방에서도 552년 돌궐제국의 등장으로 서쪽으로는 카스피해에서부터 동쪽으로 흥안령 산맥에 이르는 중앙유라시아의 통일 유목국가가 탄생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제국의 붕괴 이후 수당제국의 출현이 있기까지 중국이 새로운 통일제국의 모델을 모색했듯이, 중앙유라시아 역시 흉노제국의 붕괴 이후 선비와 유연의 시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유목제국의 모델을 탐색했던 것이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것은 양측이 찾은 해답 내용의 유사성이다. 수당제국은 오랫동안의 호한융합(胡漢融合)의 결과 탄생했기 때문에 과거 한제국에 비해 서방세계에 훨씬 더 개방적이었으며, 알타이 지방에서 기원한 돌궐인의 제국 역시 과거 흉노에 비해 서방 진출과 경영에 적극적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과 흉노의 붕괴와 함께 종말을 고한 유라시아 동부지역의 고대는 오랜 혼란기 동안 거듭된 모색을 통해서 결국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 간 교류와 통합에 적극적인 새로운 제국 체제를 찾아내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 결과 7세기부터 9세기까지 약 300년간 유라시아 대륙은 중앙유라시아의 투르크계 제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당제국, 서아시아의 칼리프제국, 그리고 서구의 비잔틴·프랑크 제국 등과 함께 새로운 국제질서를 형성하며 번영을 구가하게 된다. ▒


정복왕조론


구미나 일본에서 ‘남북의 대립’이라는 측면으로 중국사를 파악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론의 틀이다. 이것은 필자가 보기에 다시 구판 정복왕조론과 신판 정복왕조론으로 나뉘어진다. 전자는 사실상 북방민족이 약탈에서 정복과 지배로 발전하다가 결국 중국에 동화되는 과정을 겪는다는 ‘한족중심 동화론’과 거의 다를 것이 없다. 반면 후자는 미국의 신마르크스주의자 칼 비트포겔(Karl Wittfogel, 1896~1988)이 주창한 것인데, 두 개의 상이한 문화가 만나서 서로 변하면서 제3의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진다는 소위 인류학의 ‘문화접변론’을 원용하여 정복왕조가 일방적으로 한화(漢化·Sinicization)된 것은 아니었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이 역시 ‘정복왕조론’의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북방민족이 건설한 국가의 역사를 논의할 때 ‘정복’을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들의 독자적 역사세계를 잃어버리고 곧바로 중국사의 영역으로 끌려들어와 버린다. 왜냐하면 ‘정복왕조론’은 항상 정복하러 ‘오는’ 것을 말하지 정복하러 ‘가는’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중국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점이다.

/

[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

(6)]

신질서를 모색하는 고대 중앙유라시아

동아시아

,

·

흉노 양극체제 무너지며 대혼란…

7

세기 당제국으로 매듭


중국

,

오호십육국

·

위진남북조 거쳐 수나라로 통일


북방은 선비

·

유연 지배 거쳐

6

세기 돌궐제국으로


·

,

유목민 영향 漢보다 개방적


중국 역사상 북방민족의 지배기간이 절반 넘어


북방민족

, 200

년 가까이 산둥성 등 중국 북부전역 약탈


북방 새 강자 돌궐

,

카스피해까지 지배


유목민 일부 한반도로 이동

,

신라지역 정착 가능성


일부 학자 “일본까지 진출 야마토 정권 수립” 주장도

▲ 내몽골 후호호트에서 출토된 북위 시대의 무사 토용(흙으로 빚어 만든 인형).

그러나 장성 이남의 이같은 역사적 전개는 중국사의 맥락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중국사상 위진남북조라는 분열·혼란기는 그에 선행했던 시대에 동부 유라시아 국제질서의 기본적 틀이었던 한·흉노 남북대립의 양극체제의 붕괴로 발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리장성 이남의 농경지대 중국에서 일어났던 혼란과 유사한 현상이 흉노제국 붕괴 이후 북방 초원지대에서도 관찰되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바로 이러한 혼란의 파장이 확대되면서 중국사상 ‘오호십육국 시대’가 출현한 것이다. 그 과정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원후 1세기 중반 흉노가 분열되면서 일부가 고비사막을 건너서 남하했고 한제국의 영내에 거주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북방민족 남하의 시발이 되었다. 한편 초원에 잔류했던 또 다른 흉노(북흉노)가 91년경 멀리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떠나버리자, 그 자리를 채우고 들어온 것은 동쪽의 선비족이었다. 장성 이북의 새로운 패자가 된 선비족은 잔류한 흉노인을 흡수하며 중국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전을 시작하였다. 2세기 전반이 되면 약탈의 무대는 요동·요서 지역은 물론이지만 서쪽의 대군·오원·삭방 등 산서성 북부도 포함되어 중국 북부 거의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이 약탈전은 씨족·부족을 기본 단위로 하여 각 집단의 군장의 지휘하에 때로는 독자적으로 때로는 연합적으로 진행되었다. 한문자료에는 그들이 ‘대인(大人)’으로 기록되었으나 물론 선비족 고유의 명칭을 의역한 것이다. 2세기 초에는 ‘선비의 읍락 120부(部)’가 각자 중국 측과 외교관계를 맺는 등 각개약진의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2세기 중반 단석괴(檀石槐)라는 인물의 출현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약탈전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분산된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동부·중부·서부의 삼부체제로 재편하였다. 이것은 유목군대의 전형적 편제방식인 좌익·중군·우익에 준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므로, 말하자면 선비족은 단석괴의 지도 아래 대규모 군사동맹체를 결성하게 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사망한 뒤 혼란에 빠진 선비는 가비능(軻比能)이라는 인물에 의해 일시 세력을 회복하지만 235년 그가 암살당하자 선비연합체는 각 지역으로 분산·할거하면서 대대적인 이동의 물결이 일어났고 일부는 남하하여 북중국으로 들어갔다. 3세기 말이 되면 화북 지역에 거주하는 호족(胡族)의 숫자가 600만~700만명에 이르게 되는데, 당시 한족이 1000만명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유목민이 남하했는지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민족대이동의 물결 속에 일부 유목민은 북중국이 아니라 한반도로 내려와 신라지방에 자리잡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이유는 4~5세기가 되면 신라에서 갑자기 대형 적석목관분이 조영되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중앙유라시아의 문화적 기류를 느끼게 하는 유물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양한 마구, 커다란 솥인 동복(), 동물양식의 버클, 아키나케스식 단검, 금관, 유리제품 등이 그러하다. 또한 이 시기에 신라의 임금은 마립간(麻立干)이라는 새로운 칭호로 불렸는데 ‘간’은 유목국가의 군주인 ‘칸(khan)’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칸’이라는 칭호는 바로 그 즈음에 선비 계통의 유목민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와 같은 학자는 유목민의 일부가 한반도를 경유하여 일본으로 들어와 4세기 말경에는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토(大和)정권을 세웠다는 소위 ‘기마민족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부에서 훈족의 출현으로 민족대이동이 일어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대륙의 동부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거대한 규모의 민족이동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평행현상은 대륙의 동서 양단에서뿐만 아니라 장성의 남과 북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즉 양측 모두 한과 흉노의 붕괴로 인해 발생한 극도의 혼란에서 단계적으로 통일의 국면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밟아 나갔다. 북방에서 선비족의 부족별 난립이 단석괴·가비능에 의해 정리되었듯이, 남방에서도 오호십육국의 초기 혼란기가 티베트 계통의 전진(前秦)에 의해 정리되었다. 뒤이어 북방에서는 선비족의 뒤를 이어 4세기 후반 유연(柔然)이라는 새로운 민족이 초원의 패권을 장악하고 강력한 유목국가를 건설하게 되는데, 거의 같은 시기에 남방에서도 선비족 계통의 탁발(拓拔)부족이 남하하여 북위정권을 세우면서 화북을 통일하고 안정된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 두 국가는 오랫동안 군사적으로 대치하면서 전쟁을 계속했는데, 몇 년 전 애니매이션 영화로도 소개되었던 ‘뮬란’의 주인공 ‘목란(木蘭)’은 바로 유연과 전쟁에 투입된 탁발족 여인이었다.

▲ 내몽골에서 출토된 말머리와 소머리에 사슴뿔을 접합시킨 선비족의 금관.

그러다가 마침내 중국에서는 589년 수나라가 3세기 반 만에 통일제국 건설에 성공했는데, 북방에서도 552년 돌궐제국의 등장으로 서쪽으로는 카스피해에서부터 동쪽으로 흥안령 산맥에 이르는 중앙유라시아의 통일 유목국가가 탄생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제국의 붕괴 이후 수당제국의 출현이 있기까지 중국이 새로운 통일제국의 모델을 모색했듯이, 중앙유라시아 역시 흉노제국의 붕괴 이후 선비와 유연의 시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유목제국의 모델을 탐색했던 것이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것은 양측이 찾은 해답 내용의 유사성이다. 수당제국은 오랫동안의 호한융합(胡漢融合)의 결과 탄생했기 때문에 과거 한제국에 비해 서방세계에 훨씬 더 개방적이었으며, 알타이 지방에서 기원한 돌궐인의 제국 역시 과거 흉노에 비해 서방 진출과 경영에 적극적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과 흉노의 붕괴와 함께 종말을 고한 유라시아 동부지역의 고대는 오랜 혼란기 동안 거듭된 모색을 통해서 결국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 간 교류와 통합에 적극적인 새로운 제국 체제를 찾아내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 결과 7세기부터 9세기까지 약 300년간 유라시아 대륙은 중앙유라시아의 투르크계 제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당제국, 서아시아의 칼리프제국, 그리고 서구의 비잔틴·프랑크 제국 등과 함께 새로운 국제질서를 형성하며 번영을 구가하게 된다. ▒


정복왕조론


구미나 일본에서 ‘남북의 대립’이라는 측면으로 중국사를 파악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론의 틀이다. 이것은 필자가 보기에 다시 구판 정복왕조론과 신판 정복왕조론으로 나뉘어진다. 전자는 사실상 북방민족이 약탈에서 정복과 지배로 발전하다가 결국 중국에 동화되는 과정을 겪는다는 ‘한족중심 동화론’과 거의 다를 것이 없다. 반면 후자는 미국의 신마르크스주의자 칼 비트포겔(Karl Wittfogel, 1896~1988)이 주창한 것인데, 두 개의 상이한 문화가 만나서 서로 변하면서 제3의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진다는 소위 인류학의 ‘문화접변론’을 원용하여 정복왕조가 일방적으로 한화(漢化·Sinicization)된 것은 아니었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이 역시 ‘정복왕조론’의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북방민족이 건설한 국가의 역사를 논의할 때 ‘정복’을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들의 독자적 역사세계를 잃어버리고 곧바로 중국사의 영역으로 끌려들어와 버린다. 왜냐하면 ‘정복왕조론’은 항상 정복하러 ‘오는’ 것을 말하지 정복하러 ‘가는’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중국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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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

(8)]

실크로드 상권 장악한 소그드인 중국정치

·

문화까지 주물러

당나라 때 수도 장안의 평강방(平康坊)이라는 곳에 보리사(菩提寺)라는 절이 있었다. 그 옆에 현종 때 재상이었던 이임보(李林甫)의 사저가 있었는데, 생일이 되면 그는 보리사의 스님을 초청하여 찬불을 올리게 했다. 한 해는 사례로 말안장 하나를 받은 스님이 시장에 내다 팔아 7만전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보리사 스님들 사이에 이임보의 커다란 씀씀이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다들 그의 생일에 혹시 초대받지 않을까 은근한 기대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해에 한 스님이 과연 초대를 받게 되었고 열심히 찬불을 올리면서 주인의 공덕을 치켜세웠다. 그런데 막상 돌아갈 때 그가 받은 것은 불과 몇 ㎝ 안 되는 썩은 못 같은 것이었다. 크게 실망한 그는 장안 서쪽에 있는 서시(西市)로 나가 ‘상호(商胡)’, 즉 소그드 출신의 상인이 경영하는 가게를 찾아가 보여주었다. 그 가게 주인은 크게 놀라면서 “스님께서는 이런 것을 어떻게 손에 넣으셨습니까? 이것을 팔 때는 값을 잘못 매기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스님은 시험삼아 100민(緡·1민은 1000전)을 불렀더니 주인이 껄껄 웃으며 “그렇게 할까요?”라고 되물었다. 그래서 스님은 한껏 더 많이 부를 생각으로 500민이라고 했더니, 주인은 “이것은 천만(千萬)의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거액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비싸냐고 물었더니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것이 바로 보골(寶骨)입니다”였다.
이 이야기는 단성식(段成式·803~863)이 편찬한 ‘유양잡조(酉陽雜俎)’라는 글에 나오는 것으로, 일본의 학자 이시다 미키노스케의 명저 ‘장안의 봄’에 소개되어 유명해졌다. 물론 이것은 실제 사건이 아니라 설화로 꾸며낸 이야기이긴 하지만 당시의 역사적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선 ‘보골’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사리를 가리키며 당시에는 ‘불골(佛骨)’이라고도 불렀으니, 사리라고 하면 진위를 가릴 여유도 없이 수만금을 주고 사려고 하는 불교 숭배의 풍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헌종(재위 806~820)은 사리를 궁정 안에 안치하려고 했는데, 한유(韓愈)가 ‘논불골표(論佛骨表)’라는 글을 올려 이를 비판했다가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도 있었다.

오아시스

정착민

출신으로


동서

오가며

비단으로

막대한

그런데 위의 이야기가 반영하고 있는 또 다른 역사적 사실은 ‘상호’ 혹은 ‘호상(胡商)’이라고 불리는 상인이 갖고 있던 엄청난 재력인데, ‘보골’ 한 조각에 상상을 초월하는 현금을 쾌척할 정도의 재력을 갖고 서시를 좌지우지했던 이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물론 한나라 때와 같은 시대에는 ‘호’라고 하면 흉노인과 같은 북방의 유목민을 지칭했지만, 수·당대에 오게 되면 이 말은 거의 전적으로 중앙아시아의 소그드(Soghd)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따라서 ‘호상’은 곧 소그드인으로서 중국에 와서 교역에 종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던 것이다.


▲ 낙타 위의 소그드인 주막대

아주 오래전부터 ‘소그드’란 명칭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을 가리켰다. 이미 다리우스 대제 때에 새겨진 비스툰 비문(기원전 519년)에도 언급되었다. 이들은 파미르 산맥 서쪽의 건조지대, 즉 북쪽의 시르다리아 강과 남쪽의 아무다리아 강 사이에 점재하는 오아시스 도시들에 살던 정착민으로, 농사를 짓기도 하지만 수공업과 상업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여 멀리 중국이나 인도 혹은 서아시아 각지로 나가서 국제무역에도 종사하였다.

호상

이라

불리며

중국서

맹활약


장안에만

4000

여명

거주


‘호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사람이 중국 측 자료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후한대 즉 1세기 이후의 일이었고, 중국 측 문헌에는 “장사하러 오는 호상들이 매일 변경에 온다”는 기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소그드인은 쿠샨왕조의 지배를 받으며 중앙아시아~인도~중국을 연결하는 교역로를 장악했던 인도나 박트리아 출신 상인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 활동의 정도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4세기에 들어오면서 북방에서 히온(Chion)이라든가 헤프탈(Hephtal)과 같은 유목민이 대거 남하하고 약탈하면서 오늘날 아프간과 인도 서북부 지방이 황폐해졌고 종래 인도와 연결되는 교역망이 파괴되고 말았다. 이 혼란으로 초래된 공백을 메우고 국제무역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소그드 상인이었다.
 
장사라고 하면 다른 민족에게 뒤지지 않는 중국인의 눈에도 이 소그드인의 상재(商才)는 거의 천부적일 정도로 비쳤던 모양이다. ‘신당서(新唐書)’라는 역사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아이가 태어나면 사탕을 물리고 손에는 아교를 잡게 하는데, 이유인즉 그가 커서 달콤한 말을 하고 돈을 손에 쥐면 딱 달라붙게 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글 쓰는 법을 익히고 장사에 능하며 이익을 탐한다. 남자 나이 스물이 되면 이웃나라로 가는데,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아니 가는 곳이 없다.”

▲ 소그드인의 교역 네트워크와 거류지 분포

당시 중국에는 많은 수의 소그드 상인이 활약하고 있었는데 그 수를 정확히 말해주는 자료는 없다. 그러나 8세기 중반 장안에 40년 이상 거주하며 처자식을 두고 전택과 가옥을 소유한 ‘호객(胡客)’의 수가 4000명 정도였다는 한 기록만을 보아도 대충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국제교역에 종사하는 이들은 중국의 비단을 대대적으로 구입하여 육상 실크로드를 통해서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방면에서 고가에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수입을 올렸던 것이다. 따라서 국제적인 교역망을 유지·운영하기 위해서 이들은 고향이 있는 실크로드 교역로 중간 곳곳에, 그리고 중국 내 여러 도시들에 집단거류지를 형성하였다.

오아시스

정착민

출신으로

동서

오가며

비단으로

막대한

중국에 오래 거주한 사람은 중국식 성(姓)을 채택하였는데, 그때 출신도시의 이름을 따서 성을 지었다. 예를 들어 사마르칸드 출신은 ‘칸’이라는 발음을 반영한 ‘강(康)’씨를, 타슈켄트 출신은 ‘타슈’가 현지어로 ‘돌’을 뜻하기 때문에 ‘석(石)’씨를 택했다. 이렇게 해서 각각 다른 성을 갖고 교역에 종사하던 소그드인을 ‘아홉 가지 성을 가진 소그드인’이라는 뜻으로 ‘구성호(九姓胡)’ 혹은 ‘소무구성(昭武九姓)’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중앙유라시아 거의 전역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교역 네트워크를 구축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그 자세한 실태를 알기는 쉽지 않으나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07년 스타인(A. Stein)이라는 학자가 돈황 부근의 봉수대 유적지에서 발견한 고대의 편지들을 통해서 어렴풋이 그 윤곽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편지들은 중국 영내에 거주하는 소그드인이 고향인 사마르칸드로 보낸 것인데, 변경의 관문인 돈황에서 압수당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무튼 학계에 ‘고대의 소그드 서한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것은 모두 8통인데 어떤 것은 훼손이 심한 단편이지만 일부는 아주 잘 보존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 [좌] 돈황에서 발견된 소그드인 편지. [우] 사군묘에서 발견된 연회장면 석상.

예를 들어 제2서한이 그러한데, 중국 무역의 현지 총책인 나나이 반닥(Nanai Vandak)이라는 사람이 사마르칸드 본국에 있는 고용주에게 중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브리핑하고 각 도시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는 주재원의 활동을 보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편지에는 낙양에 커다란 기근과 화재가 발생하여 황제가 도주했고 ‘훈족’의 공격을 받은 소식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4세기 초두 서진(西晋)왕조가 흉노의 공격으로 멸망하게 된 사건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편지가 씌어진 시기도 저절로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나나이 반닥은 이 편지에는 자기가 중국산 순품 사향(麝香) 800g을 사서 보내니까, 이것을 팔아서 생겨나는 이윤의 일부는 자신이 사마르칸드에 남겨두고 온 아들의 교육비로 써달라는 당부를 적고 있다. 그런데 이 사향을 그 당시의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은 27㎏과 같으니, 그때 금과 은의 비가(比價)를 1 대 20으로 계산하면 금 1.35㎏에 해당하고 오늘날 우리 돈으로 하면 약 2600만원이 되는 셈이다. 당시 이들의 교역규모를 짐작케 하는 자료이다.

중국에 거주하는 소그드인의 대부분은 상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위에서 말한 서한 가운데에는 돈황에 살던 한 여인이 고향 사마르칸드에 사는 어머니와 남편에게 자신의 힘든 처지를 호소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역시 캐러밴 무역과 연관된 일을 하는 사람이 다수를 점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같은 사실은 이미 남북조 시대 말기인 북제(北齊) 때부터 이들 중국 체류 소그드인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임명한 ‘살보(薩寶)’라는 관직의 명칭에서도 확인된다. 이 말은 원래 ‘캐러밴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사르타바하(sarthavaha)’를 음역한 것으로서, 수도에는 2명이 두어지고 각 지방에는 주(州)마다 1명씩 배치되어, 구역 내의 중앙아시아·서아시아 출신 상인을 관할케 했다. 당나라 때 설치된 살보부(薩寶府)의 책임자는 정5품의 관리였다.


최근 중국의 서안에서는 소그드인이 바로 이 살보에 임명되었으며 그러한 상층인사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자료가 나왔다. 아파트 건설붐의 영향으로 도시 여러 곳이 파헤쳐지고 개발되는 와중에 소그드인의 묘지가 발견되었는데, 학계에는 묘주의 이름을 따서 안가묘(安伽墓), 사군묘(史君墓) 등으로 알려졌다. 물론 ‘안’과 ‘사’라는 성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이 중앙아시아의 부하라와 키쉬 출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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